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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읽기

갈라디아서 2장. 이신칭의의 복음을 양보할 수 없다.

작성자
wkchurch
작성일
2024-04-23 07:28
조회
217
갈라디아서 2장. 이신칭의의 복음을 양보할 수 없다.

 

 

 

1. 사도 바울은 회심 후 14년째 되던 해, 바나바와 디도를 대동하고 예루살렘을 다시 방문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 교회를 섬긴지 1년쯤 지났을 때였을 것입니다. 방문의 목적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안디옥 교회의 헌금을 전해 주려는 것이었습니다(행 11:30). '계시를 따라' 올라갔다는 말은(2), 아가보 등이 예루살렘에 큰 기근이 있을 것을 예언한 일을 가리킬 것입니다(행 11:27~28). 사도 바울은 이 때 유명한 사도들 즉 베드로, 요한, 야고보 같은 이들에게 개인적 차원에서 자기가 전하는 복음을 설명했습니다. 이 만남은 나중에 열린 예루살렘 공의회와 같은 성격의 공적 회의가 아니었습니다(행 15). 사도가 이렇게 한 것은 자신이 전한 복음의 수고가(특별히 이방인들을 위한) 헛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2. 사도는 이때 자기가 전하는 복음에 맞게 행동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헬라인 디도가 할례를 받지 않게 하였습니다(3). 이것이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에 의해 문제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자유를 엿보고 신자들을 종으로 삼으려는 자들인데, 갈라디아 교회를 어지럽혔던 자들과 같은 이들입니다(4). 만일 사도 바울이 이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한 번이라도 양보했다면, 그것은 복음의 진리를 거스르는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5).

 

 

 

3. 갈라디아 사람들은 유명한 사도들의 이름을 많이 의식했는데, 그 유명한 사도들이 사도 바울에게 전해 준 것은 없습니다(6). 도리어 베드로와 바울은 자신들이 복음을 전하는 영역을 나누었고(7~8), 사도들 사이에는 복음의 진리에 대한 이견이 없었습니다(9). 오직 하나의 복음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사도들은 바울 사도에게 가난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이방인 교회들로부터 모금을 해달라고 부탁을 했을 뿐입니다(10).

 

 

 

4. 하지만 베드로가 안디옥 교회를 방문했을 때 문제가 터졌습니다(11). 당시 교회는 이방인이 예수님을 믿을 때 그들에게 어떤 요구를 할 것인가의 문제로,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 사이에 어느 정도의 긴장이 있었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안디옥을 방문했는데,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 신자가 다수를 차지하는 최초의 교회였습니다.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던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야고보의 보냄을 받은 유대인 신자들을 보자(이들은 사실 야고보의 보냄을 받은 자들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많다, 행 15:24), 갑자기 식사 자리를 떠나는 위선을 행했고, 이것은 바나바와 다른 유대인들의 마음에도 유혹이 되었습니다.

 

 

 

5. 이것을 본 바울은 공중 앞에서 베드로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는데, 이 행위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신칭의의 진리, 즉 복음의 핵심을 삶으로 부인하는 행위와 같았습니다. 베드로의 행위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차이가 없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감히 베드로를 면전에서 그리고 공중 앞에서 책망하였습니다. 베드로가 바울의 책망 앞에서 잘못을 인정했다는 것을 기록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했기에 초대교회는 분열 대신, 복음의 진리 안에서 하나로 공고하게 세워져 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6. 이처럼 칭의 교리는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모든 차이를 무효화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16). 복음 앞에서, 그리고 완전한 거룩하심 가운데 계신 하나님 앞에서는, 도덕군자나 살인자나 모두 같은 죄인일 뿐입니다. 이렇게 인간 본성을 거스르는 이신칭의 교리는 언제나 반대를 받아왔습니다. 반론의 핵심은 이 교리가 삶의 행위를 간과하여, 오히려 죄를 조장한다는 것입니다(17). 이신칭의 교리만 믿다가 심판 날에 죄인으로 드러나면 어쩔 것이냐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결코 자신이 이전에 믿던 유대교가 가르쳤던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는, 이행칭의의 교리로 돌아가지도 않을 것이며, 다 허물었던 그 교리를 다시 세우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18).

 

 

 

7. 사도는 이신칭의 교리로부터 네 가지 원리를 도출합니다(20). 1)나는 율법을 향하여 죽었습니다. 나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시켜주는 방법으로서의 율법은 파괴되었고, 나는 그런 칭의의 수단으로서의 율법과는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죽었다). 나는 이제 율법의 지배로부터 자유롭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살려면 율법의 행위에(자존심, 자기의) 대해서 죽어야 합니다. 2)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리스도와 별개로 이루어지는 구원은 구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서, 나도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써 죄의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를 다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3)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가 된다는 연합의 교리는 이신칭의 교리의 핵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를 보시고 나를 판단하십니다. 4)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비록 칭의의 선물을 받았지만 우리는 육체를 입고 삽니다. 구원 얻는 믿음의 참된 특성은 인내하는 믿음입니다. 그것은 한 철, 한 때의 믿음이 아닙니다.

 

 

 

8. 갈라디아 사람들이 계속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따라서,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복음을 따라가려 한다면,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헛되고 욕되게 하는,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일이 되고 맙니다. “칭의의 교리를 잃어버리면 기독교 교리 전체를 잃어버리는 것이다”라고 마르틴 루터는 말했습니다. 또 토마스 크랜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신칭의 교리는 그리스도의 진정한 영광을 드러내고 인간의 헛된 영광을 뒤엎는다. 이를 부인하는 자마다 진정한 기독교인이라 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고 오히려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대한 적수이며 인간의 헛된 영광을 드러낸다.” 이 은혜의 복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이 은혜의 복음을 더 알게 해주시기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이 은혜의 복음의 진리에 합당하게 살기를 구하십시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행위로 의로울 수 없는 저희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저희를 구원하여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은혜의 복음을 더 깊이 알게 하시며, 이 진리에 합당하게 살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오직 십자가의 영광만을 드러내며 사는 은혜를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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