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읽기
창세기 8:13-18 묵상
작성자
wkchurch
작성일
2025-01-18 21:30
조회
35
[창 8:13-20 묵상]
쓰나미가 지나간 곳은 그야말로 폐허입니다. 창세기 1장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지요. 그런데 본문 속 노아는 전 지구가 혼돈하고 공허한 그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방주의 문을 닫고 들어갔다가 1년이 지나 문을 열었습니다. 그가 마주한 세상은 폐허였을 것입니다.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전혀 없는 땅을 마주했을 것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라는 표현 외에는 견줄 말이 없었겠지요. 노아의 눈으로 본 홍수심판 후의 세상은 처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달랐습니다.
창세기 8장을 보면,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3절에는 육백년 하고도 일년이 지난 해, 첫째달 첫날에 땅 위에 물이 걷혔다고 기록합니다. 육백1년 1월 1일. New Year’s day, 새로운 시작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15절에서는 이 새로운 시작의 처음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천지창조 때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지요. 새로운 시작에서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하신 일은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17절 같이 읽습니다.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 마지막 부분에 창세기 1장에 나왔던 익숙한 어구가 등장합니다.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리라”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등장하는 ‘땅’, ‘생육하다’, ‘번성하다’는 세 단어가 연속해서 등장하는 것은 창세기 1장 이후 처음입니다.
창세기 1장을 연상시키는 표현의 반복들을 보며 우리가 주지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홍수 이후의 새로운 시작은 단순히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홍수로 세상을 끝장내려 하셨던 게 아니라, 홍수를 통해 세상을 새롭게 만드시려 했던 것입니다. 본문 17절에는 “생육하고 번성하리라”는 약속이 나옵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이었지만 8장에서는 [약속]으로 주어집니다. 오늘 읽을 창세기 9장에도 2번이나 [명령]으로 주어집니다. 명령이 약속으로, 약속이 명령으로 형체를 바꿉니다. 무슨 말입니까? 구약학자들이 숱하게 얘기하는 “하나님의 명령은 약속이다”는 명제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받아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열심히 생육하고 번성해야 합니다. 가족을 보호하고 자손을 두기 위해 애쓰고 수고해야 하지요. 그러나 “생육하고 번성하리라”는 약속으로 주어지면 전혀 다릅니다. 우리를 품에 안고 “내가 너희 가족을 보호해 줄게, 염려마”하시며 속삭이시는 부드러운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방주의 문을 열고 폐허가 된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 노아는 절망스러웠을 겁니다. 그 때 하나님은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살리시겠다는 약속, 보호하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질 때, 우리는 우리 인생의 다음 장을 열게 됩니다.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다고 우리 인생의 새로운 챕터가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질 때, 새로운 챕터가 열립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명령하시고 그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심판하는 무서운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명령하시지만, 그 명령을 지킬 수 있도록 힘 주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약속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우리가 믿습니다.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우리가 삽니다. 우리에게 폐허가 된 과거, 지우고 싶은 기억들이 있다고 해도,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시고 새롭게 빚으시는 하나님 때문에 삽니다. 주 안에 감추인 새 생명을 얻으니 이전에 좋던 것도 이제는 의미가 없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산천도 초목도 새롭게 되었기 때문에 이전의 원수도 친구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약속의 말씀을 받은 노아는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20절 말씀 같이 읽습니다.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가장 먼저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한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라는 표현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만남이 있었을 때 주로 쓰였습니다. ‘여호와의 제단’, 혹은 ‘여호와 앞에서 제단’을 쌓았다는 표현은 일반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 제단’, 다시 말해 ‘여호와를 위한 제단’을 쌓았다는 표현은 독특합니다. 한 인간이 하나님과 특별한 만남을 가진 후에 경외심에 사로잡혀 제단을 지었을 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잘 아시는 창세기 12장에서 하란을 떠난 아브라함을 다시 하나님께서 만나주시자, 아브라함이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습니다(7절). 창세기 13장에서도 조카 롯에게 좋은 땅을 양보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언약의 말씀을 하신 후 아브라함이 또다시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습니다(18절).
노아도 아마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경외심에 사로 잡혀 제단을 쌓았을 것입니다. 온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는 분, 물도 마음대로 조종하시고,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분임을 방주 속에 있던 내내 그가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전에 알던 하나님보다 더 직접적이고 강렬하게 하나님을 체험하였을 것입니다. 바라고 원하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와 같이 강렬하게 만나주셔서 우리가 하나님께 제단을 쌓는 귀한 은혜의 역사가 있기를 원합니다. 교회적으로도 하나님을 위한 참된 제단이 쌓여지기를 소망합니다.
쓰나미가 지나간 곳은 그야말로 폐허입니다. 창세기 1장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지요. 그런데 본문 속 노아는 전 지구가 혼돈하고 공허한 그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방주의 문을 닫고 들어갔다가 1년이 지나 문을 열었습니다. 그가 마주한 세상은 폐허였을 것입니다.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전혀 없는 땅을 마주했을 것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라는 표현 외에는 견줄 말이 없었겠지요. 노아의 눈으로 본 홍수심판 후의 세상은 처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달랐습니다.
창세기 8장을 보면,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3절에는 육백년 하고도 일년이 지난 해, 첫째달 첫날에 땅 위에 물이 걷혔다고 기록합니다. 육백1년 1월 1일. New Year’s day, 새로운 시작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15절에서는 이 새로운 시작의 처음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천지창조 때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지요. 새로운 시작에서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하신 일은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17절 같이 읽습니다.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 마지막 부분에 창세기 1장에 나왔던 익숙한 어구가 등장합니다.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리라”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등장하는 ‘땅’, ‘생육하다’, ‘번성하다’는 세 단어가 연속해서 등장하는 것은 창세기 1장 이후 처음입니다.
창세기 1장을 연상시키는 표현의 반복들을 보며 우리가 주지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홍수 이후의 새로운 시작은 단순히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홍수로 세상을 끝장내려 하셨던 게 아니라, 홍수를 통해 세상을 새롭게 만드시려 했던 것입니다. 본문 17절에는 “생육하고 번성하리라”는 약속이 나옵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이었지만 8장에서는 [약속]으로 주어집니다. 오늘 읽을 창세기 9장에도 2번이나 [명령]으로 주어집니다. 명령이 약속으로, 약속이 명령으로 형체를 바꿉니다. 무슨 말입니까? 구약학자들이 숱하게 얘기하는 “하나님의 명령은 약속이다”는 명제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받아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열심히 생육하고 번성해야 합니다. 가족을 보호하고 자손을 두기 위해 애쓰고 수고해야 하지요. 그러나 “생육하고 번성하리라”는 약속으로 주어지면 전혀 다릅니다. 우리를 품에 안고 “내가 너희 가족을 보호해 줄게, 염려마”하시며 속삭이시는 부드러운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방주의 문을 열고 폐허가 된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 노아는 절망스러웠을 겁니다. 그 때 하나님은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살리시겠다는 약속, 보호하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질 때, 우리는 우리 인생의 다음 장을 열게 됩니다.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다고 우리 인생의 새로운 챕터가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질 때, 새로운 챕터가 열립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명령하시고 그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심판하는 무서운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명령하시지만, 그 명령을 지킬 수 있도록 힘 주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약속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우리가 믿습니다.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우리가 삽니다. 우리에게 폐허가 된 과거, 지우고 싶은 기억들이 있다고 해도,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시고 새롭게 빚으시는 하나님 때문에 삽니다. 주 안에 감추인 새 생명을 얻으니 이전에 좋던 것도 이제는 의미가 없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산천도 초목도 새롭게 되었기 때문에 이전의 원수도 친구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약속의 말씀을 받은 노아는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20절 말씀 같이 읽습니다.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가장 먼저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한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라는 표현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만남이 있었을 때 주로 쓰였습니다. ‘여호와의 제단’, 혹은 ‘여호와 앞에서 제단’을 쌓았다는 표현은 일반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 제단’, 다시 말해 ‘여호와를 위한 제단’을 쌓았다는 표현은 독특합니다. 한 인간이 하나님과 특별한 만남을 가진 후에 경외심에 사로잡혀 제단을 지었을 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잘 아시는 창세기 12장에서 하란을 떠난 아브라함을 다시 하나님께서 만나주시자, 아브라함이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습니다(7절). 창세기 13장에서도 조카 롯에게 좋은 땅을 양보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언약의 말씀을 하신 후 아브라함이 또다시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습니다(18절).
노아도 아마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경외심에 사로 잡혀 제단을 쌓았을 것입니다. 온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는 분, 물도 마음대로 조종하시고,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분임을 방주 속에 있던 내내 그가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전에 알던 하나님보다 더 직접적이고 강렬하게 하나님을 체험하였을 것입니다. 바라고 원하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와 같이 강렬하게 만나주셔서 우리가 하나님께 제단을 쌓는 귀한 은혜의 역사가 있기를 원합니다. 교회적으로도 하나님을 위한 참된 제단이 쌓여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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